- YH사건 (1979년 8월)
- History/역사클립
- 2006/09/10 22:31
- YH사건, 김영삼, 박정희 유신정권, 신민당, 대한민국>서울
1979년 8월 11일 서울 마포구 신민당사에 1천여명의 무술경관들이 들이닥쳤습니다. 경관들은 무자비한 진압 작전을 시도했죠. 이들의 목표는 당시 신민당사에서 농성중이던 YH무역회사의 여공들을 강제 해산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에겐 숨겨진 목표도 있었죠. 야당인 신민당을 부수는 것.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여공들은 자살 시도로 이들의 탄압에 맞서고, 신민당 관계자들도 이들의 당사 진입에 항의했습니다. 하지만 이날 경찰은 여공, 신민당 당직자, 현역 국회의원, 기자들까지 무자비하게 진압해버립니다. 그때까지 비교적 안전하리라고 여겨졌던 야당 당사였지만, 그래서 여공들은 신민당사에서 시위를 했지만, 박정희 정권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신민당사에 공권력을 휘둘렀습니다. 결국 이 와중에서 여공 한명이 죽었고,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측근 최형우의 목숨을 건 경호로 겨우 탈출하게 됩니다. 이것이 이른바 ‘YH사건’입니다.
YH무역의 여공들은 왜 시위를 벌였나?
먼저 YH무역주식회사에 대해서 알아보죠. 이 회사는 장용호라는 자가 세운 가발가공회사였습니다. 그는 자기 이름의 이니셜을 따서 회사명을 YH라고 지었답니다. YH무역은 가발 수출 호경기를 만나 급격하게 성장을 거듭합니다. 1970년에는 수출실적 100만불을 달성하고, 종업원이 4000여명, 당시 수출 순위가 15위에 이르렀다고 하네요.
그러나 1970년 9월 사장 장용호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상당한 액수의 회사자금을 해외로 빼돌립니다. YH의 새로운 사장은 장용호의 동서인 진동희 였는데요. 그는 76년 대보해운 등을 설립하면서 YH의 자금을 유용하고 개인 재산 축적에 열을 올리게 됩니다. 이때부터 YH의 사세는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고, 70년대 후반 가발산업이 사양화되면서 많은 타격을 받았다고 하네요. 이즈음 회사에는 여공들을 중심으로 노조가 설립되었고, 사장과 기타 관리자들의 사재 축적에 대항해 싸웠습니다.
YH무역의 노조 탄압은 가히 상상을 초월합니다. YH무역은 77년도부터 잦은 휴업을 했습니다. 일거리가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죠. 하지만 일거리가 없었던 것은 경영진이 회사의 일거리를 다른 회사에 하청을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청을 맡은 조그만 회사들은 대개 YH무역의 말단 관리자들이 회사의 지원을 받아 세운 회사들이었답니다. 경영진은 노조를 깨부수기 위해 회사의 일거리를 빼돌리고 자주 휴업을 하면서 노동자들을 회사에서 몰아내고자 했던 겁니다. 경영진들은 이런 조치에 만족하지 않고 지방으로 회사이전신청까지 냈대요. 지방에 쓸모없는 창고 하나를 사서 아무런 제반 시설도 갖추지 않고 노동자들에게 무조건 이동을 지시하는 거죠. 그리고 지시를 거부하는 노동자에게는 무조건 해고의 칼을 들이댔답니다. 기가 막히죠?
1979년 8월 YH무역주식회사는 폐업공고를 냅니다. 노조는 폐업 무효화를 위해 투쟁했구요. 지금까지 한국사회에서 노조는 회사를 말아먹고 나라의 경제를 망치는 존재로 선전되어 왔습니다만, 언제나 그렇듯 YH사건에서 회사를 망하게 한 것은 경영진이었고 회사를 지키려고 한 것은 노동자들이었습니다. 당시는 수출드라이브 정책이 최우선이었으니 만큼 정부가 회사를 지키려는 노동자의 편을 들어줄 만했을 것 같은데요. 권력은 끝까지 있는 자들의 편이었어요. 오히려 정부는 크리스찬아카데미사건을 일으키며 모든 노동조합의 정당한 투쟁이 마치 외부 불순세력의 지도에 의한 빨갱이들의 스트라이크인 것처럼 선전하기까지 합니다.
결국 YH의 여공들은 정부와 회사의 탄압에 맞서 좀더 안전한 곳에서 농성을 하기로 결정합니다. 문동환 신부, 시인 고은, 이문영 교수 등은 신민당총재 김영삼을 만나 이 문제를 논의했구요. 김영삼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8월 9일 YH 여공들의 신민당사 농성이 시작되었던 거죠.
79년 태풍의 시작, YH사건
1979년은 말 그대로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연초 제 2차 석유파동은 한국 경제를 전반적으로 뒤흔들어 버렸죠. 전국적으로 많은 회사들이 석유파동의 물결에 넘어지면서 실업자들이 속출했고, 물가는 두자리수로 상승했습니다. 박정희의 유신체제는 그 간의 경제적 성공으로 국민들을 회유하면서 강력한 독재체제로 18년간이나 유지했었죠.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1979년의 경제적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체하기엔 이미 너무 경직되었던 것 같습니다. 박정희의 저임금에 기반한 국가주도의 밀어붙이기식 경제정책의 한계는 민중의 저항에서 시작되었던 거죠.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노동자들의 파업과 그 중심에 있던 YH사건이 김영삼의 국회 제명이라는 초유의 정치적 사건을 만나 부마항쟁으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어요. 80년 거대한 민중 항쟁의 불길은 이미 막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여공들은 자살 시도로 이들의 탄압에 맞서고, 신민당 관계자들도 이들의 당사 진입에 항의했습니다. 하지만 이날 경찰은 여공, 신민당 당직자, 현역 국회의원, 기자들까지 무자비하게 진압해버립니다. 그때까지 비교적 안전하리라고 여겨졌던 야당 당사였지만, 그래서 여공들은 신민당사에서 시위를 했지만, 박정희 정권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신민당사에 공권력을 휘둘렀습니다. 결국 이 와중에서 여공 한명이 죽었고,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측근 최형우의 목숨을 건 경호로 겨우 탈출하게 됩니다. 이것이 이른바 ‘YH사건’입니다.
YH무역의 여공들은 왜 시위를 벌였나?
먼저 YH무역주식회사에 대해서 알아보죠. 이 회사는 장용호라는 자가 세운 가발가공회사였습니다. 그는 자기 이름의 이니셜을 따서 회사명을 YH라고 지었답니다. YH무역은 가발 수출 호경기를 만나 급격하게 성장을 거듭합니다. 1970년에는 수출실적 100만불을 달성하고, 종업원이 4000여명, 당시 수출 순위가 15위에 이르렀다고 하네요.
그러나 1970년 9월 사장 장용호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상당한 액수의 회사자금을 해외로 빼돌립니다. YH의 새로운 사장은 장용호의 동서인 진동희 였는데요. 그는 76년 대보해운 등을 설립하면서 YH의 자금을 유용하고 개인 재산 축적에 열을 올리게 됩니다. 이때부터 YH의 사세는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고, 70년대 후반 가발산업이 사양화되면서 많은 타격을 받았다고 하네요. 이즈음 회사에는 여공들을 중심으로 노조가 설립되었고, 사장과 기타 관리자들의 사재 축적에 대항해 싸웠습니다.
YH무역의 노조 탄압은 가히 상상을 초월합니다. YH무역은 77년도부터 잦은 휴업을 했습니다. 일거리가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죠. 하지만 일거리가 없었던 것은 경영진이 회사의 일거리를 다른 회사에 하청을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청을 맡은 조그만 회사들은 대개 YH무역의 말단 관리자들이 회사의 지원을 받아 세운 회사들이었답니다. 경영진은 노조를 깨부수기 위해 회사의 일거리를 빼돌리고 자주 휴업을 하면서 노동자들을 회사에서 몰아내고자 했던 겁니다. 경영진들은 이런 조치에 만족하지 않고 지방으로 회사이전신청까지 냈대요. 지방에 쓸모없는 창고 하나를 사서 아무런 제반 시설도 갖추지 않고 노동자들에게 무조건 이동을 지시하는 거죠. 그리고 지시를 거부하는 노동자에게는 무조건 해고의 칼을 들이댔답니다. 기가 막히죠?
1979년 8월 YH무역주식회사는 폐업공고를 냅니다. 노조는 폐업 무효화를 위해 투쟁했구요. 지금까지 한국사회에서 노조는 회사를 말아먹고 나라의 경제를 망치는 존재로 선전되어 왔습니다만, 언제나 그렇듯 YH사건에서 회사를 망하게 한 것은 경영진이었고 회사를 지키려고 한 것은 노동자들이었습니다. 당시는 수출드라이브 정책이 최우선이었으니 만큼 정부가 회사를 지키려는 노동자의 편을 들어줄 만했을 것 같은데요. 권력은 끝까지 있는 자들의 편이었어요. 오히려 정부는 크리스찬아카데미사건을 일으키며 모든 노동조합의 정당한 투쟁이 마치 외부 불순세력의 지도에 의한 빨갱이들의 스트라이크인 것처럼 선전하기까지 합니다.
결국 YH의 여공들은 정부와 회사의 탄압에 맞서 좀더 안전한 곳에서 농성을 하기로 결정합니다. 문동환 신부, 시인 고은, 이문영 교수 등은 신민당총재 김영삼을 만나 이 문제를 논의했구요. 김영삼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8월 9일 YH 여공들의 신민당사 농성이 시작되었던 거죠.
79년 태풍의 시작, YH사건
1979년은 말 그대로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연초 제 2차 석유파동은 한국 경제를 전반적으로 뒤흔들어 버렸죠. 전국적으로 많은 회사들이 석유파동의 물결에 넘어지면서 실업자들이 속출했고, 물가는 두자리수로 상승했습니다. 박정희의 유신체제는 그 간의 경제적 성공으로 국민들을 회유하면서 강력한 독재체제로 18년간이나 유지했었죠.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1979년의 경제적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체하기엔 이미 너무 경직되었던 것 같습니다. 박정희의 저임금에 기반한 국가주도의 밀어붙이기식 경제정책의 한계는 민중의 저항에서 시작되었던 거죠.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노동자들의 파업과 그 중심에 있던 YH사건이 김영삼의 국회 제명이라는 초유의 정치적 사건을 만나 부마항쟁으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어요. 80년 거대한 민중 항쟁의 불길은 이미 막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Recent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