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8.15. 넷째날 : 코사멧, 방콕

- 안녕, 코사멧

다시 방콕으로 나가야 한다. 이 평화로운 바닷가를 떠나야한다는 게 마냥 아쉽지만, 어쩔 수 있나. 언젠가는 꼭 머물고 싶은 곳에서 머물고 싶을 때까지 머물 수 있는 날이 있겠지. 말짱하게 갰던 하늘이 떠날 때가 되니 또 한방울씩 떨어진다. 너희들도 아쉽구나. 그치?

내일 새벽 비행기를 타야하니 오늘이 마지막날인데, 마지막 오후를 뭐하고 보낸다? 가보고 싶은 멋진 레스토랑도 많고 소문난 마사지샾들도 가고 싶은데, 그러려면 아무래도 수쿰빗 근처로 나와야 할 거 같아 고민이다. 숙소가 카오산 근처라 다시 택시를 타고 나오는 게 망설여진다. 무엇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언제나 여행을 하면 이게 젤 고민이거든. 시간은 한정이 되어 있는데 가고 싶은 곳은 많고. 이럴 때는 이런 말을 꼭 해야한다. 다음에 또 오지 뭐. 이번이 마지막 여행도 아니고 말야. 실제 또 오게 될지 마지막이 될지는 알 수 없는 거지만, 어쨌든 이렇게 말하고 나면 좀 위안이 된다. 자고로 여행에서는 시간을 쪼개기보다는 장소를 쪼개는 것이 더 좋은 법.
그래서 그냥 숙소 근처에서만 있기로 했다. 카오산 근처에서 밥을 먹고 마사지도 받고 술도 마시는 걸로 계획을 세우고, 방콕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 카오산으로 가는 길

방콕에 도착해서 늦은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동대문으로 갔다. 시큼하고 시원한 김치말이 국수를 먹고 나니 힘이 났다. 주문을 하고 계산을 하는 동안 한국말을 쓸 수 있다는 것도 의외로 신나는 일이었다.
슬슬 카오산 쪽으로 걸어갔다. 아, 이런 곳이구나. 생각보다 크지 않은 길이라는 얘길 듣고 갔으니 망정이지 안그러면 놀랄 뻔 했다.^^ 여행을 처음 생각했던 순간부터 늘 머릿속으로 꿈꾸던 카오산이라는 곳을 막상 내발로 밟으니 왠지 모르게 안도가 되었다.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여행의 자유로움과 흥분을 즐기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왠지 모르게 용기가 되었다. 어딘가에서 떠나온 누군가가 이렇게 많다는 건, 나도 언제고 떠날 수 있다는 보험 같은 거였으니까. 아마도 나는 다시는 카오산에 오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태국에 온다고 해도 카오산은 아마도 가지 않겠지. 말하자면 통과의례 같은 곳. 이제 되었다.


- 카오산 거리

카오산 골목을 끝까지 둘러보며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시간을 보내다 마사지를 받으러 갔다. 카오산 초입에 있는 허벌 마사지로 들어가니 사람좋아 보이는 빼빼마른 아저씨가 우리를 반긴다. 한 30분 쯤 기다리다가 마사지를 시작했는데, 온몸에서 우드득우드득 거리고 장난이 아니다. 특히 머리에 손 올리고 허리를 돌릴 땐 최악이었다. 안쓰는 근육을 오랜만에 썼더니 악! 하는 비명이 아니라 으억! 하는 비명이 나온다. 두시간을 꼬박 받았는데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남들은 다 눈 감고 마사지 받는데, 난 혼자 눈 말똥말똥 뜨고 있었다. 집에 가서 나중에 신랑이랑 나랑 둘이 해보려면 유심히 살펴보고 기억해 둬야지. ㅋ 오늘 밤에 각오하시라.


- 밤의 파쑤멘 요새

어느새 어둑해지고 있는데, 점심이 늦게 먹어서인지 별로 밥생각이 없다. 간단하게 먹으면서 맥주나 마셔야겠다. 카오산보다는 좀더 조용한 곳으로 가고 싶어 숙소 근처인 파아팃 로드 Phra Athit Road로 꺾어 들어갔다. 파아팃 로드의 가게들은 모두 한칸 짜리의 조그만 상점들인데 태국 대학생들이 자주 찾는 곳들이 많다고 한다.
어딜 갈까 하다가 기분좋은 이름을 찾아냈다. 바 발리 Bar Bali. 안그래도 태국에 와서 더 발리가 간절해졌었는데 그 이름을 보게 될 줄이야. 작은 카페 겸 술집인데, 내부 장식이나 음식은 발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듯 했다. 1층에는 사람이 많이 2층으로 올라갔는데 깔끔하고 단정한 분위기가 맘에 든다. 마지막 식사니만큼 똠얌꿍을 먹어야겠다. 커리는 별로 입에 맞지 않았지만, 쏨땀도 맛있었고 무엇보다 똠얌꿍, 너무 맛있었다. 다른 곳과는 달리 여기 똠얌꿍은 크림색인데, 크림인지 코코넛밀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담백한 맛이 느껴져 바닥까지 싹싹 긁어 먹었다.


- 바 발리의 모습

한창 맥주를 마시면서 여행의 여운을 달래고 있는데 갑자기 스피커가 지지직거리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잡음이 섞인 노랫소리가 들린다. 어? 라이브 하나 보네. 이 조그만 가게에서 라이브할 공간이 어디 있다고? 어쨌든 마지막밤을 음악과 함께라.. 너무 좋을 걸.
무대랄 것도 없이 그냥 카운터석 의자에 앉아 기타치면서 노래를 하고 있다. 가만히 보니 아까 2층 우리 옆자리에서 밥을 먹던 지현우 닮은 청년이다. 아, 그랬군. 노래도 적당히 듣기 좋고 노래 실력도 괜찮은 편인데, 무엇보다 다들 친구인 듯 보이는 태국 젊은이들이 술을 마시다 노래를 따라 부르다 하는 분위기가 참 멋졌다. 아는 노래는 하나도 없었지만 포크락이라는 건 어디에서나 비슷한 법이라 귀로 즐기기에는 충분했다.
태국은 요즘 양주 마시는 게 유행이라던데 역시 그 가게에서 맥주를 마시는 건 우리뿐이었다. 다들 맥주를 마셔서 그런지 맥주잔에도 얼음을 넣어주어 색다른 맛이었다. 먹어도 먹어도 맛있길래 계속 먹다보니 어느새 앞자리 남자애들과 건배를 하기도 하고 담배를 나누기도 했다. 늦은 밤 술집문을 나설 때, 그 젊은이들이 우리에게 인사를 한다. See You Again! 하고.
아, 그래. See You 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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