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좌익은 왜 삼상회의 결정안 지지로 선회했는가?
- History/역사클립
- 2006/09/10 01:29
- 박헌영, 삼상회의결정안, 조선공산당, 대한민국>서울
공식적인 삼상회의 결정안의 내용은 12월 28일에 국내에 들어와서, 29일 국내신문에 일제히 보도되었습니다. 그러나 12월 24일 경부터 동아일보를 비롯한 국내의 신문은 삼상회의 결정안의 내용이 신탁통치안이 다인 것처럼, 또 그것은 소련의 의도대로 결정된 것처럼 보도하고 있었죠. 이러한 왜곡보도는 국내에 거센 반탁의 바람을 일으켰고, 그것은 신탁반대운동인 동시에 중경임정 추대운동으로, 그리고 반소반공투쟁의 양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좌익세력의 결의안 수용 과정
좌익계열은 임정 주도의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에 참석하지 않고, 12월 30일 별도로 '반파쇼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하였습니다. 그들은 친일파, 반역분자, 독재정치주의자가 민족분열을 조장하여 신탁통치를 받게 되었다면서, 신탁의 철폐를 위하여 민족통일전선을 공고히 결성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좌익의 입장표명은 조심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소련이 신탁을 주장했다는 왜곡보도 때문이었죠. 좌익들도 1월 중순까지는 삼상회의의 결정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과정을 통해 결정되었는지 잘 모르고 있었어요.
좌익계열은 반탁의 입장을 표명하긴 했지만 김구 주도하의 반탁운동에는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였습니다. 탁치 '반대'라는 표현보다는 '철폐', '해결' 등의 용어를 사용하면서요. 그런데 1946년 1월 1일 오후 또는 1월 2일부터 조선공산당은 180도 방향전환을 하게 됩니다. 삼상회의 결정은 조선민족해방을 확보하는 진보적 결정이라면서 삼상회의 결정안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입장을 전환했던 거죠. 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에서도 1월 2일 미·영·소·중 4개국에 삼상회의 결정안을 지지하는 전문을 보내고 지지노선으로의 선회를 명백히 하였습니다. 결국 1월 3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서울시민대회는 반탁대회에서 반탁을 반대하는 대회로 돌변하게 되었어요. 이제 국내의 상황은 우익계열의 반탁과 좌익계열의 삼상회의 결정 지지라는 양극의 노선으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소련의 지령? 박헌영의 독단?
좌익측은 왜 일관성 없이 극에서 극으로의 입장전환을 한 것일까요? 여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요. 소련의 지령을 받았다는 설, 임정과의 헤게모니 쟁탈설, 당수뇌부의 독자적 결정설, 당의 내부고민설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소련의 지령설은 박헌영이 직접 평양에 가서 삼상회의 결정의 지시를 받고 왔다거나, 서울에 있는 소련영사관으로부터 지령을 받았다는 설이에요. 그러나 박헌영이 언제 어디서 어떤 경로로 소련의 지령을 받았는가 하는 명확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허점이 많았죠. 더구나 지령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개 조선공산당을 소련의 조종을 받는 집단으로 규정하고, 소련이 일방적으로 탁치를 지지하도록 지령했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더 큰 비판을 받았습니다. 요즘 연구들은 대부분 지령설을 부정하거나 일부만을 인정하고 있어요.
임정과의 헤게모니 쟁탈설은 반탁운동을 임정이 주도해가자 임정과의 합작을 제의하지만, 이것이 실패할 조짐이 보이자 헤게모니를 탈환하기 위하여 임정과 정반대의 입장으로 노선을 바꿨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향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겠지만, 기본적으로 이는 당시 좌익들을 너무 무시하는 설명이죠. 반공적 시각 때문에 당시의 사회주의 운동이 갖고 있던 진보성을 권력투쟁으로 단편화시키는 의도적인(?) 오류를 보여줍니다.
세 번째 당수뇌부의 독자적 결정설은 박헌영 등의 당수뇌부의 독자적인 결정에 의해 입장을 전환했다는 설입니다. 이러한 의견은 삼상회의 결정안에 대한 공산당의 정확한 인식이 1월 중순경에야 나오는 것을 논거로 소련의 지령설을 부정하고, 박헌영이 8월테제 이래 가지고 있었던 국제민주주의 노선에 의해 삼상회의 지지를 결정하게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박헌영 등의 공산당 수뇌부는 원칙만 옳으면 민족감정이나 정치적 효과를 고려하지 않고 밀고 나가는 원칙주의자였기 때문에 이후 1월 3일 서울시민대회 등을 저돌적으로 강행할 수 있었다는 거죠. 결국 이 설은 두 가지 효과를 가지고 있는데요. 첫째는 기존의 말도 안되는 지령설을 조선공산당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반박하는 것이구요. 둘째는 그 결정의 독자성을 지도부의 것으로만 한정하여 박헌영과 그의 추종세력의 비민주성을 비판하는 것이에요.
마지막으로 당의 내부고민설은 삼상회의 직후부터 그 결정을 지지해야 한다는 견해가 내부에서 나오고 있었고, 그러한 고민 끝에 지지노선을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조선공산당의 중요간부 뿐만 아니라 하부지구에서도 이와 관련한 지지 반대 의견이 있었구요, 공산당 이외에 근로인민당이나 화북동맹계열도 상당한 내부 동요를 겪었다는 주장입니다.
소련의 영향력
좌익의 입장전환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증언들이 있는데요, 당시 소련 군정의 책임자들, 북한의 전직 고위관리들과의 얘기를 정리해보면 박헌영이 1945년 12월 28일에서 1946년 1월 2일 사이에 평양을 방문했던 것이 확인됩니다. 박헌영은 소련 군정사령관으로부터 신탁통치에 대한 소련의 입장을 들었다고 해요. 이러한 사후 증언이 얼마나 신빙성을 갖는 것인지는 판단하기 힘들지만, 몇가지 근거를 들어보죠.
먼저 조선공산당 측에서 삼상회의 결의안을 지지하면서 '신탁이 아니라 후견이다'라는 주장을 한 점입니다. 후견이라는 말은 대부분 아시다시피 소련측의 텍스트를 북한이 번역할 때 '신탁' 대신에 사용한 용어였죠. 또 레베데프 장군은 서울의 거센 반탁 분위기와 관련하여 박헌영을 평양으로 부르기로 계획했다고 증언했어요. 또 박헌영이 미제간첩으로 몰려 재판을 받을 때 당시 평양에 가서 김일성 집에 머물렀던 것을 언급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반박할 만한 증언들도 있죠. 대표적인 것은 박헌영 주치의의 증언인데요. 그는 그당시 박헌영의 건강상태가 북행할 만큼 좋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심증은 있지만 박헌영의 방북을 증명할 직접적인 증거가 없으니 어느 쪽으로든 확정할 수는 없는 거죠. 그러나 소련이 탁치를 주장했다는 왜곡보도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공산당은 당연히 소련의 의견을 듣고자 노력했을 겁니다. 박헌영이 직접 방북하지 않았다고 해도 누군가가 그러한 중계 역할을 했겠죠.
우리는 좌익의 입장선회에 소련의 결정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것은 조선공산당이 입장 선회를 발표한 이후 심각한 내부갈등을 겪었다는 사실입니다. 갈등의 수습과정은 꽤 오래 걸린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여하튼 그 과정에서 삼상회의 결정안이 조직 전체에 이해되고 지지 받을 수 있게 되었죠. 만약 소련의 지령 때문에 입장을 선회했다면 이런 갈등 양상은 없었을 겁니다. 또한 그것이 설령 지령이라 해도 지령을 받는 사람들이 그 지령을 아무런 반감없이 수용한 것이 아니라 갈등 속에서 토론과정을 거쳐 이해되고 수용되었다면 그것이 지령이겠습니까?
당시에 조선공산당이 소련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않았다는 것은 소련을 중심으로 한 세계 공산주의 운동진영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른 나라 공산당들도 이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였죠. 소련은 러시아혁명이후 세계혁명의 기치아래 코민테른이나 코민포름 같은 국제 조직을 통해 세계혁명운동을 지원하고자 하였습니다. 자국 보위를 우선 고려한 것이긴 했지만요. 그러나 일국 일당의 원칙이나 코민테른의 공산당 승인 문제는 일제 강점기 때부터 조선공산당의 가장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해방 직후의 조선공산당도 이러한 운동의 연속선상에 있었구요. 더욱이 박헌영은 8월테제에서 소련이 주도했던 국제민주주의원칙을 통한 한국문제의 해결을 주장하였습니다.
조선공산당의 오류는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당의 주류 지도부가 충분한 토론과정을 생략하고 당원들을 이해시키려는 노력없이 결정안을 수용하고자 한 점에 있습니다. 그것이 지령이었든, 자발적인 결정이었던 간에 말입니다. 물론 하루 하루가 다른 급박한 상황이었다는 점을 감안해야겠지만, 박헌영 측이 첫 단추를 잘못 끼움으로써 혼란이 야기되고 오히려 수습 기간이 더 오래 걸렸죠. 당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지 못한 것은 기본적으로 박헌영의 책임이며 당조직의 문제입니다. 결국 좌익들이 주도한 서울시민대회는 많은 문제를 일으키며 비민주적으로 강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대회가 반탁의 물결을 뒤집을 수 없었습니다. 이해를 원한 것이 아니라 순응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해방일보도 한동안 나오지 못할 정도로 내부적 갈등을 겪으면서 뒤늦게야 삼상회의 결정안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하게 된 것은 조선공산당에게 뼈아픈 실책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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