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7.23. 둘째날 : 삿포로

거대한 호빵, 삿포로 돔 경기장

날이 밝았다. 역시 추웠다. 오늘의 계획은 삿포로 외곽의 관광지를 오전에 둘러보고 삿포로 시내로 돌아와 홋카이도 대학에 가는 것이다. 외곽과 시내를 모두 돌아 교통편을 이용할 일이 많은 날이어서 삿포로 1day 티켓을 끊었다.

우선 첫 번째로 갈 곳은 히쓰지카오카 전망대(羊ヶ丘 展望臺). 지하철로 후쿠즈미(福住)역에 가서 츄오(中央)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버스 시간이 넉넉해서 근처에 있다는 삿포로 돔 경기장을 보러 갔다. 날씨도 잔뜩 흐린데다가 바람이 부는 삿포로 경기장은 거대한 호빵 같았다. '참, 굉장한 디자인 감각이군'하고 생각하며 버스에 올랐다. 버스를 타고 히쓰지카오카 전망대까지 오르는 길은 작은 밭과 아기자기한 집들이 있는 예쁜 거리였다.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양의 언덕의 양

히쓰지카오카는 말그대로 양의 언덕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양을 쫓는 모험』의 주인공은 양을 쫓아 이 홋카이도에 왔었는데, 나도 그 여정을 흉내내 머리에 별이 있는 양을 찾아 양의 언덕에 올랐다. 삿포로의 시가지를 가리키고 있는 클라크 박사의 동상과 넓은 언덕. 상상했던 흰색이 아닌 누런 양들. 벤치며 쓰레기통이며 화장실까지 모든 게 양이다. 바람을 피해 쉬러 간 휴게실에서는 아주 맛있는 우유를 먹었다. 홋카이도는 유제품이 아주 유명하다고 들었기 때문에 우유나 치즈나 아이스크림을 잔뜩 먹는 것도 이번 여행의 포인트이다.

히쓰지카오카 언덕을 내려가는 버스를 타고 가면서 다시 그 예쁜 마을을 지났다. 그냥 내려서 걸어가며 사진을 찍을까 하는 마음이 굴뚝같았는데, 첫날이니만큼 계획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내리고 싶다는 마음을 꾹꾹 눌렀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손을 흔들어주던 홋카이도 개척마을

다음 목적지는 홋카이도 개척마을이다. 말하자면 민속촌 같은 곳인데, 남의 나라 민속촌에 뭐하러 가나 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처음에 여행 계획을 짤 때 넣었었던 시라오이의 아이누족 마을을 여러 사정상 빼게 되면서 이곳이라도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넣은 곳이었다. 역시 삿포로 외곽에 있기 때문에 또 버스 터미널에 가서 버스를 타야했다. 아주 한산했던 버스를 타고 광활한 개척마을에 도착했는데, 제법 쌀쌀한 날씨여서 그런지 사람이 많지 않았다. 한글로 된 안내지를 받아들고 복원한 옛 관청, 신문사, 사진관, 각 상점들을 들여다보았다. 대부분 실내까지 모두 들어가 볼 수 있었고, 거리에는 옛날 옷을 입은 사람들이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기도 하는 등 세심하게 마음을 쓴 곳이었다.

마을을 돌아다니다가 작은 매점을 발견하곤 얼른 들어가 따뜻한 우유를 먹었다. 두꺼운 작은 잔에 담긴 우유와 따끈한 오뎅을 먹으니 몸이 좀 풀리는 것도 같다. 한 겨울처럼 추운 건 아니었지만, 차라리 겨울이 낫지, 여름이 추울 수도 있다는 건 생각도 못해본 일이라 더 엄살이 난다. 작은 바람에도 금새 닭살이 돋는다.




점심으로 먹은 주장어반(朱藏御飯)

점심은 시내에 돌아와서 먹기로 하고 삿포로 시내로 돌아왔다. 점심을 먹을 곳으로 골라둔 곳은 홋카이도 대학 앞에 있는 작은 카페이다. 시대로 돌아오니 확실히 바람도 덜 불고 해가 반짝이는 것 같았다. 양지로만 걸어서 홋카이도 대학 근처의 주장(朱藏)이라는 가게를 찾았다.

이 카페는 삿포로에 사는 한 부부가 맛집을 추천하는 사이트에서 찾은 곳인데, 일본 가정식을 먹을 수 있다는 곳이었다. 멋들어지게 흘려쓴 메뉴판을 보고 더듬더듬 점심을 주문하곤, 카페 안을 천천히 구경했다. 오래된 나무 탁자와 의자, 낡은 선풍기, 작은 화분들과 조용한 재즈가 흘러 마음이 편한 곳이었다. 이윽고 식사가 나왔다. 쟁반에 가득 작은 반찬 그릇과 국과 밥이 있었는데, 3명의 밥상을 모두 합쳐도 같은 접시가 하나도 없었다. 마음에 드는 접시가 보일 때마다 하나하나 산 것인 듯 제각각인 접시에 처음 보는 반찬이 담아져 있다. 밥 앞에 놓여진 젓가락 밑에는 작은 들꽃이 한 송이 놓여져 있었다. 밥을 먹기도 전에 마음이 먼저 가득 찬다.

음식이 모두 입에 맞는 건 아니었다. 약간 달짝지근하고 시큼했다. 그래도 밥 한 공기를 말끔히 비워내고 커피까지 마셨다. 일본의 커피는 우리 커피보다 쓰다. 역시나 작은 잔이었지만, 그래도 커피 맛이 참 좋았다.




울창한 숲을 가진 홋카이도 대학

배가 부르니 좀 덜 추울까도 싶었는데, 홋카이도 대학의 넓은 길을 부는 바람은 여전히 녹녹치 않았다. 오르막길을 한참 걸어야 하는 대학을 다녔던 우리들은 넓은 평지에 있는 홋카이도 대학이 심히 부러웠다. 몇 개인가의 일본 대학을 가보았었는데, 홋카이도 대학이 단연 으뜸인 것 같다. 넓~은 평지와 아담한 건물들. 울창한 가로수와 시간의 켜가 느껴지는 대학의 분위기. 정말 이런 학교라면 다닐 맛 이 나겠다 하는 생각도 들고, 이 학교에 반해 어학연수를 삿포로로 왔다는 어떤 사람의 말이 실감나기도 했다.




울창한 가로수

엄청나게 넓은 이 학교에서 꼭 보아야 할 곳은 포플러 나무 길과 플라타너스 나무 터널. 그런데 나무가 워낙 많은 데다 모든 가로수가 잘 가꾸어져 있어서 도통 어떤 것이 포플러 나무 길인지 플라타너스 나무 터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걷기로 했다.

그리고 또 하나, 이 학교는 사사키 노리코의 만화 『닥터 스쿠르』의 배경인 바로 그 학교이다. 그러니 마사키와 니카이도가 다니던 수의학부 건물을 꼭 보고 싶었다. 학교 구석에 쳐박혀 있다고 하긴 했어도 어쨌든 보고 싶었다. 그런데 수의학부까지 찾기엔 학교가 너무 넓었다. 게다가 건물이 길 앞에 딱 보이는 게 아니라 대부분 나무 뒤에 숨어 있어서 가까이 다가가기 전까진 무슨 학부 건물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약학부까지는 발견했는데, 도저히 수의학부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걷기로 했다.




여기저기 자전거 주차장

이 넓은 학교를 다니려면 자전거는 필수인 것 같다. 자전거가 정말 많았다. 아스팔트 바닥이든 잔디밭이든 평평한 곳은 어디나 자전거 주차장이 되어 있었다. 곳곳에 넓은 호수와 벤치도 많았다. 한 호수에서 본 오리들은 사람들이 아주 익숙한지 발치까지 다가갔는데도 놀라는 시늉도 하지 않는다. 홋카이도 대학은 걸어도 걸어도 계속되었다. 두어 시간을 걷다가 결국 추워서 그만 나가기로 했다.




밤의 오도리공원

이제 오늘 꼭 보기로 계획했던 곳들은 끝이 났다. 여기서 숙소가 있는 스스키노까지는 지하철 한 구간 정도가 되는데, 걷다보면 주요 관광지라고 불리우는 곳들이 심심치않게 나온다. 여유도 있고 배도 별로 안 고프고 해서 저녁을 때우러 케잌집을 찾아 슬슬 돌아다니기로 했다. 아까렌카 라고 불리는 빨간 벽돌의 홋카이도청 舊 본청사, 삿포로의 명물이라는 시계탑 그리고 텔레비전탑까지 지나 삿포로 한복판의 긴 공원, 오도리 공원(大通 公園)에 도착했다. 지금이 오도리 납량축제라는 여름 맥주축제 기간이라 여기저기 맥주를 마실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추운 날씨에 차가운 맥주를 마시면 정말 감기가 들 것 같았다. 긴팔 옷을 입고 나왔다면 마셨을텐데 하며 맥주는 밤으로 미뤘다.

저녁으로 때울 케잌을 먹기로 한 후르츠케잌 팩토리 라는 가게를 찾아갔는데, 생각보다 크고 화려한 곳이었다. 좀 유치할 정도로. 아늑하고 심플한 케잌점을 기대했었는데, 이렇게 사람이 복작대는 곳을 오게 되다니. 어쨌든 맛으로 승부하는 세계는 맛을 봐야 진정한 판단을 할 수 있는 거니까, 일단 먹기로 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따뜻한 차와 딸기 타르트 등등 과일 케잌을 몇 개 시켰다. 역시나 화려한 케잌이 나왔는데, 맛은.. 음.. 기대 이하였다. 내가 사는 인천에 평소 잘 가는 케잌 가게가 있는데, 워낙 그 집 케잌이 맛있어놔서 여기 케잌은 만족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우리가 갔던 징기스칸 집, 開拓屋

케잌 때문에 아쉬워진 마음이어서 9시가 다 되어 가는데 숙소로 돌아가기가 싫어졌다. 그래서 좀 몸을 녹이며 술을 마실 곳을 찾았다. 맛집으로 골라둔 곳 중에 유명한 징기스칸 집이 있었는데 그 집으로 가기로 했다. 골목골목을 헤메다 드디어 그 징기스칸 집 다루마를 찾았는데, 역시나 가게 밖까지 줄이 길게 서 있었다. 가게가 작기도 하고 워낙 유명한 집이라니까 어느 정도 예상은 했는데, 이 정도로 줄이 길 줄은 몰랐다. 양복 쟈켓까지 턱하니 팔에 끼고 편안하게 기다리는 아저씨들을 보니 도저히 그 뒤를 기다릴 엄두가 나질 않았다. 밥집도 아니고 술집인데.




지글지글 징기스칸

그래서 이번에도 그 옆집으로 들어갔다. 開拓屋라는 옆집 역시 징기스칸 집인데, 비교적 한산했다. 카운터 자리 밖에 없는 구조라서 우선 들어가 자리를 잡고 고기를 시켰다. 징기스칸은 양고기 요리인데, 요리랄 것도 없이 그냥 불 위에 구워서 양념장 같은 거에 찍어먹는 것이다. 양고기는 좀 노린내가 난다는 얘길 들었었는데, 전혀 비리지도 않고 굉장히 부드러웠다. 낮에 본 양의 언덕의 양들이겠거니 하는 생각이 머리를 잠시 스치기도 했지만, 개의치 않고 맛있게 먹어 주었다.

지글지글 익는 고기를 앞에 두고 술잔을 기울이는 맛은 어느 곳에서나 어느 때에나 같은 느낌인 것 같다. 고기가 계속 추가되고 맥주에서 일본주를 넘나들며 일본에서의 첫날 밤은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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