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익숙함, 크로아티아 - 흐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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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안에서 잠시 자고 일어났더니 벌써 흐바섬이 보인다. 크로아티아 제2의 관광지 (물론, 그 1은 두브로브닉) 라고 불리는 이곳은 휴식을 위한 천혜의 조건을 가진 섬이다. 맑은 물과 올드 시티, 지척에 널린 섬들과 산 꼭대기 전망대,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긴 일조시간과 화창한 날씨. 멀리 부두가 보이기 시작하자 벌써 마음이 노골노골해진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흐바타운이다. 흐바도 들어가는 배는 대부분 신시가지인 스타리 그라드Stari Grad 로 들어가는데, 그쪽으로 가면 버스를 타고 흐바타운으로 들어와야 하기 때문에 신경써서 흐바타운 가는 배를 기다렸다. 흐바타운에 내려서 미리 예약해둔 민박집을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런.. 민박집 약도를 안가져왔네. 결국 영어로 써진 설명을 따라 골목길을 헤멨다. 예약할 때 확인한 지도로는 굉장히 가까운 거리였는데, 예상하지 못한 복병. 엄청난 언덕길. 게다가 모두 돌계단. 두둥. 우리 오빠는 그 큰 캐리어를 들고 내리쬐는 땡볕 아래서 ... 하여간 고생 엄청 했다. 미안한 맘에 나는 그나마 안되는 영어가 더 엉키기 시작해서 잘못된 길로 들어가기 일쑤였다. 언덕 꼭대기까지 올라 지나가는 할아버지 아니었음 영원히 도착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ㅜ.ㅜ 땀으로 목욕하듯 헥헥 대던 우리는 아.. 이런 고생은 두 번은 못하겠다 싶어 흐바에서 이틀을 묵기로 결정했다. 원래 계획은 호기좋게도 흐바섬에서 1박, 코르츌라섬에서 1박이었는데, 과감하게, 아니, 힘겹게 코르츌라를 버렸다. 코르츌라섬을 못본건 아쉽지만, 그래도 지금 생각해보면 흐바에서 이틀 묵길 정말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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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흐바는 이런 모양

한숨 돌리고 나선 흐바의 거리는 온통 햇빛으로 가득차 있다.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앉아 시간이 흘러가는 걸 보고 있자니 세상에 이렇게 태평할 수가 없다. 가까운 해변에는 마음 내키는 곳에 자리 깔고 누워있는 사람들, 젖은 머리와 수영복 차림으로 거리를 걷는 사람들, 멀리 한가로이 떠있는 보트 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 창가에 걸터앉아 책을 읽는 사람들. 누군가 게으를 수 있는 자유에 대해서 말을 했다지. 그 말은 여기에선 무의미하다. 모두가 게으를 수 있고, 게을러져야 하는 곳이니 말이다. 시간도 게으르게 흘러가는 일상, 그게 흐바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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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흐바에서 우린 한 일이 없다. 천천히 저녁을 먹고, 슬렁슬렁 걸어 산책을 다니고, 바닷바람도 살짝 맞았다가, 바다를 바라보며 벤치에 앉아 맥주를 마셨을 뿐이다. 어딘가의 카페에서 연주하는 재즈 선율이 바람결에 들렸다나 뭐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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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컷 늦잠을 자고 일어나 나무로 만든 격자창을 연다. 우리 방은 해안가 반대쪽으로 창이 나있어 그다지 운치는 없지만 나무 창을 여는 것 만으로도 왠지 빨강머리 앤이 된 듯한 기분이다.
오늘도 이렇다할 계획은 없다. 오전에는 물놀이나 나가볼까. 민박집 옆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면 바로 앞이 바다다. 프란체스코 수도원 아래의 해변은 이미 사람들이 들어차기 시작해서 우린 좀더 나간 바위 위에 자리를 잡았다. 더우면 물에 들어갔다가 지치면 나왔다가 하며 우린 아드리아 해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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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놀이를 끝내고는 그늘 아래 들어가 점심으로 준비한 빵을 먹었다. 프란체스코 수도원은 박물관도 겸하고 있는데 이 수도원 그늘이 바다를 보며 쉬기엔 안성맞춤이다. 이탈리아인인 듯 보이는 시끄러운 가족이 물 속에 들어가 놀고 있다. 꼬마녀석 형제가 공놀이를 하다가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다 들린다. 저 멀리에선 조그만 요트에 올라타 서로 떨어뜨리려 흔들어대는 아이들도 보이고, 물 한쪽에선 흐바 동네 아이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하더니 다이빙 경주를 하며 놀고 있다. 나비처럼 활짝 펼쳐졌다가 빠지기도 하고 촉새처럼 뾰족하게 떨어지기도 하고 양다리를 벌렸다가 구부렸다가, 이 녀석들 보통 재주가 아니다. 덩달아 신이 난 우리가 사진을 찍자 '포토' '포토' 외치며 더 신이 났다. 짜식들, 쇼맨십까지.
아, 여기서 낮잠 한잠도 좋겠다. 저녁 때가 되도록 거기서 그렇게 앉아 있었으니, 정말 낮잠을 잔 것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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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저녁을 먹으러 어제 갔던 피자집에 또 가니 서빙보는 청년이 아는 척을 한다. 네, 맛있어서 또 왔어요. 하는 눈빛을 보내주고 저녁을 먹으며 해가 지길 기다렸다. 해가 지기 시작하면 산 꼭대기 요새에 올라가야지.
1557년 세워진 스판욜(Spanjol) 요새는 투르크의 침공을 막기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이렇게 산꼭때기까지 올라왔을까 싶긴 한데, 주변을 살피며 방어하는 기능으로는 그 몫을 톡톡히 해냈을 것 같은 모양새이다. 맘편히 택시를 타고 요새에 오르니 흐바의 전경이 시원하게 눈에 들어온다. 파노라마 라는 말은 이렇게 쓰라고 있는 거구나 싶은, 그런 모습이다. U자 모양으로 들어온 부두, 황혼녘의 빛나는 집들, 점점이 떠있는 섬들,  긴 궤적을 그리며 가는 배들. 캬. 엽서로구나.
흐바 여행을 준비하면서 봤던 사진들이 모두 비슷하길래 왜그런가 했더니, 모두 여기 올라와서 찍은 거였군. 얼른 올라오시라. 모두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있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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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에 올라 해가 지는 흐바를 바라보니 뭔가 중요한 걸 먼 곳에 두고 온 듯한 느낌이다. 밑도끝도 없이 그렇다. 간혹 상실감은 유전자에 새겨진 본성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조망' 이라는 단어가 갖는 느낌이 이런 것인가 보다.
노을이 보이는 곳에는 나 앉으라고 누군가가 벤치를 가져다 두었다. 산너머로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우두커니 있는 것도 참 좋다. 사람 좋아 보이던 한 아저씨가 찍어준 우리 사진에 나는 어김없이 눈을 감고 있지만, 그래도 참 좋다. 내일이면 이 섬을 떠나야 한다는 아쉬움이 들 새도 없이 그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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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를 내려가는 길은 지그재그로 꺾어진 산길이다. 크로아티아는 연인끼리 와야 제맛이라던데, 이 산길에도 어김없이 들어맞는다. 그저 거칠고 건조해진 산길일 뿐인데, 군데군데 큼직한 선인장이 괴기스러울 정도의 길인데, 신기하게도 옆에 있는 사랑과 손을 잡고 싶고 어깨를 부비고 싶게 만드는 길이다. 길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내 얘길 들어봐, 내 얘길 들어봐, 옛날에 말이야...'하고 말을 건다.
긴 길을 내려오니 흐바에는 이미 어둠이 내려 앉았다. 멀리 떠 있는 요트들이 저마다 꼭대기에 불을 밝혀 바다에도 별이 떴다. 아, 하루가 또 가는구나. 흐르는 시간을 잡을 수 있는 건 맥주 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크로아티아의 맥주를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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