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정휴의 <세칭 ‘한성정부’의 조직주체와 선포경위에 대한 검토>
- History/역사리뷰
- 2006/09/11 14:35
- 임시정부, 천도교, 한성정부, 대한민국>서울
<세칭 ‘한성정부’의 조직주체와 선포경위에 대한 검토>
<3.1운동과 천도교단의 임시정부 수립구상>
3.1운동 전후에 나타난 임시정부 수립 운동에 대한 기존의 통설은 한성정부와 상해임시정부, 대한국민의회 등 3개의 임시정부를 실체가 있었던 정부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성정부는 13도 대표에 의한 ‘국민대회’라는 민주적 절차를 거쳐 국내에서 수립되었다는 점에서 대한민국의 정통으로 이해되지요.
하지만 이러한 우리의 임시정부에 대한 지식은 잘못된 것이 많습니다. 기존의 통설은 실증적 연구를 바탕으로 한 결과가 아닌 것이 대부분입니다. 지금 소개하고자 하는 고정휴의 두 논문은 기존의 통설을 대대적으로 수정하는 의미있는 연구성과입니다. (그림은 기미독립선언서)
먼저 한성정부에 대해서 살펴보죠. 고정휴에 의하면 한성정부의 조직은 각 종교단체의 대표들이 참여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인적구성은 주로 기독교와 유교측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특히 기독교계가 유교계를 비롯한 다른 세력들을 끌어들인 측면이 강합니다. 출신지역은 대부분 서울과 충청도로 이루어져 있고 서북출신은 철저히 배제되었습니다.
한성정부의 선포 문건에는 13도 대표에 의해 조직된 것으로 되어있지만 그것은 국민적 합의 절차를 거쳐 정부가 조직, 선포되었음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한 명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13도 대표가 모이는 ‘국민대회’는 실행되지도 않았답니다. 국민대회를 조직할 준비 모임도 유산되었구요.
또한 고정휴는 한성정부가 망명정부의 성격을 강하게 띄고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각료 인선의 대부분이 집정관총재인 이승만을 비롯하여 해외거주자가 대부분이었고, 이규갑처럼 국내에 있던 세력도 한성정부 선포를 전후해서 해외로 망명하게 되죠. 이것은 한성정부 역시 상해임시정부와 마찬가지로 망명 활동을 기본으로 설정하였던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고정휴에 의하면 한성정부의 조직을 선포하기 위한 국민대회의 개최와 가두시위, 전단배포의 임무는 학생조직이 맡고 있었다고 합니다. 김유인, 이춘균 등이 중심이 된 이들은 대개 함경도 출신으로 한성정부의 지도부가 기호파 중심이었던 것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여줍니다. 당시 임시정부 수립을 둘러싼 주요한 노선의 대립은 대개 종교적인 차이와 출신지역 차이(기호파 대 서북파)에 의한 것이었던 만큼 이러한 차이는 극히 의외적인 모습입니다. 고정휴는 이러한 출신 지역의 차이 때문에 이후 한성정부의 학생조직이 한성정부의 기호 중심에 반발하여 이동휘를 집정관으로 한 신한민국정부를 조직, 선포하게 된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한성정부가 대한민국의 정통으로 이해되었던 장점들이 모두 오해였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또한 한성정부는 다른 임시정부와 달리 선포문건에서 공화제의 이념을 명확히 제시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기독교 계열이 보수적인 유림세력을 포섭하기 위해 시대적 요구를 포기한 결과입니다.
이제 천도교 계열을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 수립 운동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죠. 먼저 ‘노령임시정부’는 기존에 ‘대한국민의회’에 의해 조직?선포된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하지만 반병률은 <대한국민의회의 성립과 조직>이라는 논문에서 노령임시정부와 대한국민의회이 아무런 연관성이 없음을 밝혔죠. 고정휴는 그 연장선상에서 노령임시정부가 ‘대한민간정부’와의 공통된 특징인 정부형태(대통령제)와 정부수반(손병희), 직제 등이 같다는 점을 들어 노령임시정부가 천도교세력이 대외적 선전효과를 노리고 선포한 정부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한편 ‘조선민국임시정부’는 국호에서 ‘민국’을 명시하여 명확히 공화국가의 성립을 선언하였다고 합니다. 이 임시정부는 ‘조선민국임시정부 창립장정’이라는 구체적인 정부 구성 내용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한데요, 정부조직의 형태와 직제를 보면 국내의 천도교세력이 좀더 우세한 가운데 미주의 독립운동세력도 고루 안배한 일종의 과도적 연립정부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고정휴는 조선민국임시정부의 조직적 실체를 천도교 계열로 이해하였습니다. 정부의 수반과 각료명단에서 천도교단의 주요인물이 다수 포함되어 있고, 이 정부의 성립을 알리는 전단 제작과 배포에 천도교인들이 직접 관련되었기 때문이죠.
조선민간정부와 노령임시정부, 조선민국임시정부는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먼저 공화국가의 수립을 목표로 설정했다는 점, 정부수반이 천도교에서 절대적 권위를 인정받던 손병희가 추대되었던 점, 국내 천도교단이 중심이 되어 처음부터 망명정부를 목표로 했던 신한민국정부나 한성정부와는 다른 면모를 보였던 점 등이죠.
결론적으로 고정휴는 한성정부가 기존에 3.1운동의 정통, 더 나아가 대한민국의 정통으로 이해되었던 것이 과도한 결론이었음을 밝히는데 성공하였습니다. 특히 한성정부는 이승만 정권 이래 대한민국의 정통으로 이해되어 왔던 점에서 그동안의 오해는 정치적 요인에 의해 강제된 측면이 강합니다. 당시 상해임시정부도 한성정부를 국내를 대표하는 정부로 오해하고 자신들의 명분을 한성정부에서 찾고자 했었죠. 그만큼 한성정부에 대한 오해는 일찍부터 시작된 셈입니다.
또한 고정휴는 상대적으로 무시되었던 조선민국임시정부나 신한민국정부의 의미를 새롭게 부각하고 있습니다. 기존에는 한성정부와 대한국민의회, 상해임시정부 외에는 전단정부라고 폄하되고 그 실체가 부정되어 왔었죠. 그는 자신의 연구성과를 통해 이들 임시정부가 천도교 계열을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 였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사진은 3.1운동에 참여한 민중)
한가지 아쉬운 점은 이 주제와 관련하여 그가 천도교 계열의 임시정부라고 추론한 이유가 단순하다는 데 있습니다. 고정휴는 이들 정부가 손병희를 수반으로 했다는 이유를 이러한 판단의 가장 큰 논거로 삼고 있는데요, 실제로 이들 정부가 이승만의 해외활동을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점에서 꼭 그렇게 볼 수만은 없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입니다. 한번 읽어보시죠.
<3.1운동과 천도교단의 임시정부 수립구상>
3.1운동 전후에 나타난 임시정부 수립 운동에 대한 기존의 통설은 한성정부와 상해임시정부, 대한국민의회 등 3개의 임시정부를 실체가 있었던 정부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특히 한성정부는 13도 대표에 의한 ‘국민대회’라는 민주적 절차를 거쳐 국내에서 수립되었다는 점에서 대한민국의 정통으로 이해되지요. 하지만 이러한 우리의 임시정부에 대한 지식은 잘못된 것이 많습니다. 기존의 통설은 실증적 연구를 바탕으로 한 결과가 아닌 것이 대부분입니다. 지금 소개하고자 하는 고정휴의 두 논문은 기존의 통설을 대대적으로 수정하는 의미있는 연구성과입니다. (그림은 기미독립선언서)
먼저 한성정부에 대해서 살펴보죠. 고정휴에 의하면 한성정부의 조직은 각 종교단체의 대표들이 참여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인적구성은 주로 기독교와 유교측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특히 기독교계가 유교계를 비롯한 다른 세력들을 끌어들인 측면이 강합니다. 출신지역은 대부분 서울과 충청도로 이루어져 있고 서북출신은 철저히 배제되었습니다.
한성정부의 선포 문건에는 13도 대표에 의해 조직된 것으로 되어있지만 그것은 국민적 합의 절차를 거쳐 정부가 조직, 선포되었음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한 명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13도 대표가 모이는 ‘국민대회’는 실행되지도 않았답니다. 국민대회를 조직할 준비 모임도 유산되었구요.
또한 고정휴는 한성정부가 망명정부의 성격을 강하게 띄고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각료 인선의 대부분이 집정관총재인 이승만을 비롯하여 해외거주자가 대부분이었고, 이규갑처럼 국내에 있던 세력도 한성정부 선포를 전후해서 해외로 망명하게 되죠. 이것은 한성정부 역시 상해임시정부와 마찬가지로 망명 활동을 기본으로 설정하였던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고정휴에 의하면 한성정부의 조직을 선포하기 위한 국민대회의 개최와 가두시위, 전단배포의 임무는 학생조직이 맡고 있었다고 합니다. 김유인, 이춘균 등이 중심이 된 이들은 대개 함경도 출신으로 한성정부의 지도부가 기호파 중심이었던 것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여줍니다. 당시 임시정부 수립을 둘러싼 주요한 노선의 대립은 대개 종교적인 차이와 출신지역 차이(기호파 대 서북파)에 의한 것이었던 만큼 이러한 차이는 극히 의외적인 모습입니다. 고정휴는 이러한 출신 지역의 차이 때문에 이후 한성정부의 학생조직이 한성정부의 기호 중심에 반발하여 이동휘를 집정관으로 한 신한민국정부를 조직, 선포하게 된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한성정부가 대한민국의 정통으로 이해되었던 장점들이 모두 오해였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또한 한성정부는 다른 임시정부와 달리 선포문건에서 공화제의 이념을 명확히 제시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기독교 계열이 보수적인 유림세력을 포섭하기 위해 시대적 요구를 포기한 결과입니다.
이제 천도교 계열을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 수립 운동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죠. 먼저 ‘노령임시정부’는 기존에 ‘대한국민의회’에 의해 조직?선포된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하지만 반병률은 <대한국민의회의 성립과 조직>이라는 논문에서 노령임시정부와 대한국민의회이 아무런 연관성이 없음을 밝혔죠. 고정휴는 그 연장선상에서 노령임시정부가 ‘대한민간정부’와의 공통된 특징인 정부형태(대통령제)와 정부수반(손병희), 직제 등이 같다는 점을 들어 노령임시정부가 천도교세력이 대외적 선전효과를 노리고 선포한 정부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한편 ‘조선민국임시정부’는 국호에서 ‘민국’을 명시하여 명확히 공화국가의 성립을 선언하였다고 합니다. 이 임시정부는 ‘조선민국임시정부 창립장정’이라는 구체적인 정부 구성 내용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한데요, 정부조직의 형태와 직제를 보면 국내의 천도교세력이 좀더 우세한 가운데 미주의 독립운동세력도 고루 안배한 일종의 과도적 연립정부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고정휴는 조선민국임시정부의 조직적 실체를 천도교 계열로 이해하였습니다. 정부의 수반과 각료명단에서 천도교단의 주요인물이 다수 포함되어 있고, 이 정부의 성립을 알리는 전단 제작과 배포에 천도교인들이 직접 관련되었기 때문이죠.
조선민간정부와 노령임시정부, 조선민국임시정부는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먼저 공화국가의 수립을 목표로 설정했다는 점, 정부수반이 천도교에서 절대적 권위를 인정받던 손병희가 추대되었던 점, 국내 천도교단이 중심이 되어 처음부터 망명정부를 목표로 했던 신한민국정부나 한성정부와는 다른 면모를 보였던 점 등이죠.
결론적으로 고정휴는 한성정부가 기존에 3.1운동의 정통, 더 나아가 대한민국의 정통으로 이해되었던 것이 과도한 결론이었음을 밝히는데 성공하였습니다. 특히 한성정부는 이승만 정권 이래 대한민국의 정통으로 이해되어 왔던 점에서 그동안의 오해는 정치적 요인에 의해 강제된 측면이 강합니다. 당시 상해임시정부도 한성정부를 국내를 대표하는 정부로 오해하고 자신들의 명분을 한성정부에서 찾고자 했었죠. 그만큼 한성정부에 대한 오해는 일찍부터 시작된 셈입니다.
또한 고정휴는 상대적으로 무시되었던 조선민국임시정부나 신한민국정부의 의미를 새롭게 부각하고 있습니다. 기존에는 한성정부와 대한국민의회, 상해임시정부 외에는 전단정부라고 폄하되고 그 실체가 부정되어 왔었죠. 그는 자신의 연구성과를 통해 이들 임시정부가 천도교 계열을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 였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사진은 3.1운동에 참여한 민중)한가지 아쉬운 점은 이 주제와 관련하여 그가 천도교 계열의 임시정부라고 추론한 이유가 단순하다는 데 있습니다. 고정휴는 이들 정부가 손병희를 수반으로 했다는 이유를 이러한 판단의 가장 큰 논거로 삼고 있는데요, 실제로 이들 정부가 이승만의 해외활동을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점에서 꼭 그렇게 볼 수만은 없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입니다. 한번 읽어보시죠.
고정휴, <세칭 한성정부의 조직주체와 선포경위에 대한 검토>, <<한국사연구>> 97, 한국사연구회, 1997
고정휴, <3.1운동과 천도교단의 임시정부 수립구상>, <<한국사학보>> 3-4, 고려사학회,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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