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준기의 '정전후 1950년대 북한의 정치변동과 권력재편'
- History/역사리뷰
- 2006/09/11 14:12
- 8월종파사건, 김일성, 단일지도체제, 북한>평양
1950년대는 북한역사상 가장 역동적인 시대였습니다. 이 시대의 정점에 '8월 종파사건'이 있었죠. 백준기는 '8월 종파사건'에 관한 한 가장 앞선 연구자입니다. 북한사연구는 부족한 사료로 인해 사실 규명조차 힘든 경우가 많았는데요, 백준기는 광범한 러시아 자료 분석을 통해 이러한 벽을 뛰어넘고 있어요. 그가 주로 사용한 자료는 '러시아연방 외무성 대외정책 문서'입니다.
지금부터 소개하려는 두 개의 논문은 서로 보완적 성격을 띄고 있습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첫 번째 논문은 1950년대 있었던 북한 지배세력들간의 권력갈등이 소련과 가지는 연관성에 대한 연구입니다. 두 번째 논문에서는 이러한 권력갈등과 중국의 상관관계를 첨가하여 8월 종파사건과 중·소간의 상관관계를 추적합니다. 또한 8월 종파사건 이후 북한의 권력갈등 양상을 정리하여 1950년대 북한의 권력갈등과정을 완결 짓고 있죠. (사진은 김일성)
'8월 종파사건'의 배경
8월 종파사건에 관한 연구에서 그동안 주요한 논쟁의 초점은 8월 종파사건의 배경에 대한 논쟁이었습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이 사건의 배경을 극우반공주의에 입각한 북한내 파벌들간의 단순한 권력투쟁이라는 시각에서 벗어나, 전후 경제복구와 발전전략 수립과정에서 나타난 북한 지배집단사이의 정책상의 갈등이라고 설명해왔습니다.
백준기는 이러한 기존 설명을 부정합니다. 오히려 김일성 지도부의 정책 적용 과정에서 나타난 사회경제적 위기가 더욱 근본적인 배경이라는 거죠. 중공업 우선 노선에 입각한 전후 경제정책 적용과정에서 나타난 오류가 1954, 55년의 극심한 사회경제적 위기를 야기하고, 이러한 위기가 지배엘리트 내의 분열을 가져왔으며, 중·소의 정치적 개입을 불렀다는 겁니다.
백준기는 전후 경제 복구 계획의 수립이 소련의 지도부와 소련 경제 고문들에 의해 작성되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계획 수립 과정에서 대내외적 논쟁과 대립은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그에 의하면 소련지도부와 소련 경제 고문 양측은 모두 공업부분의 건설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일치된 의견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당시 소련과 동구권의 대북 경제 원조는 북한 총예산의 31.6%를 차지했기 때문에, 북한 지도부가 산업 부문간의 발전 우선 순위를 선택할 재량권을 갖고 있었다고 보기도 어렵구요.
8월 종파사건의 배경을 경제발전계획 수립상의 노선갈등으로 설명하는 논자들은 대부분 김일성 지도부의 중공업 우선 정책과 연안계·소련계 인사들의 소비재 중심 정책간의 갈등으로 설명합니다. 연안계와 소련계는 스탈린 사후 말렌코프 행정부의 영향을 받아 소비재 중심 정책을 주장했다는 겁니다. 이에 대해 백준기는 말렌코프와 흐루시초프의 논쟁이 몇 개월에 걸친 짧은 기간에 해소되었다는 점에서 말렌코프의 정책이 북한에 준 영향을 부정합니다.
북한의 경제적 위기, 소련의 개입
자, 그럼 백준기가 그리는 '8월 종파사건'을 요약해보죠. 앞서 얘기했듯이 전후 경제 복구 건설 계획은 소련경제고문과 전문가들이 중심이 되어 입안했지만, 계획안의 세부계획 및 집행은 북한의 당·정 관료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계획을 집행할 엘리트의 선발과 충원 자체가 어려웠죠. 지방 하부단위기관의 간부도 수적으로 부족하고 자질도 함양미달인 자가 대부분이었답니다. 여기에 국가기구의 잦은 개편·폐지로 인해 정책이 일관성있게 추진되지도 못했구요, 고위직 관리들에 대한 잦은 교체, 관료들의 부정부패가 만연하였답니다. 소비재의 만성적인 부족현상, 그리고 1955년 화폐의 증발은 엄청난 물가상승을 가져왔습니다.
농업협동화는 인적·물적 지원 없이 진행되었고, 그나마 빈농 우선이어서 협동조합은 빈곤함을 만성적인 빈곤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여기다 1954, 55년 최악의 흉작으로 작물 수확량이 대폭 감소하는 바람에 수만명이 아사하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그럼에도 현물세의 징수는 그대로 이루어지니까 농민들의 반발이 극에 달하게 되지요. 이러한 경제위기는 정책 실패에 따른 책임소재 문제로 확대되고, 지도부 내의 갈등이 권력 갈등으로 비화하게 되는 겁니다.
소련은 1955년 초 북한 국내 정세의 불안정, 특히 경제 분야의 심각성을 인식하면서 북한의 내부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게 됩니다. 소련의 당·정 지도부는 북한지도부의 경제 복구 발전 계획 집행이 전반적으로 실패했다고 평가합니다.
1955년 소련공산당은 중국과의 협의과정을 거쳐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로동당 지도부를 모스크바로 소환합니다. 여기서 북한지도부는 소련으로부터 북한 경제 계획에 대한 근본적인 정책 수정을 권고 받게 됩니다. 소련지도부의 권고안은 대부분 관철되었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은 사회경제적 위기의 책임을 지도부내의 책임으로 돌리면서 책임문제가 자신에게 쏠리는 것을 방어하려고 합니다.
1955년 4월 전원회의에서 박창옥과 김일은 양곡구매사업과 관련하여 심한 문책을 당하고, 연안계의 박일우와 김운, 방호산 등이 출세분자로 비판받은 것이 모두 이러한 예입니다. 이때 실시한 전체 당원들에 대한 계급교양사업이나 자기비판, 자백운동 등도 경제적 실패를 전사회적인 책임으로 돌리고자 하는 김일성 그룹의 의도하에 추진된 것입니다. 결국 1955년 12월 전원회의에서는 연안계의 박일우와 소련계 김열의 반당행위에 대한 비판과 함께 당적 처벌이 결정되었습니다. 이후 소련계에 대한 전면적인 숙청이 진행되어 박창옥, 박영빈, 기석복, 정동혁, 정률 등이 당적 처분을 받았죠.
8월 종파사건과 중국·소련의 개입
이런 흐름을 뒤집을 만큼 큰 사건이 발생합니다. 바로 1956년 2월에 있었던 소련공산당 제 20차 대회입니다. 여기서 흐루시초프는 스탈린 개인숭배 비판, 평화공존을 제창하고 사회주의 이행의 다양성을 인정하였습니다. 소련공산당 20차 대회는 연안계와 소련계에게 반전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연안계와 소련계는 개인숭배 문제를 빌미로 그동안 김일성 그룹의 과오를 비판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는 얻지 못했죠. 하지만 이 일을 계기로 연안계와 소련계는 비로소 반김일성 투쟁을 위해 공동전선을 형성합니다.
연안파와 소련파는 김일성이 소련과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를 방문한 1956년 6월 1일부터 7월 19일 사이에 반김일성 투쟁을 본격화 하였습니다. 이들을 지원한 것은 북한 주재 소련대사였던 이바노프 였답니다. 최창익, 서휘, 윤공흠, 고봉기 등 연안계와 박창옥 등 일부 소련계, 이필규, 류축운, 오기섭 등 국내계가 합법적인 방법으로 김일성을 당위원장에서 축출하는 것을 목표로 결집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투쟁은 최용건 등 김일성 계열에 포착되면서 실패하게 됩니다. 8월 30일 열린 8월 전원회의에서 윤공흠은 김일성 그룹을 공격했지만, 대부분의 중앙위원들이 김일성을 옹호하면서 이들의 행위를 반당적 행위로 규정하였던 겁니다. 결국 윤공흠, 서휘, 리필규 등은 출당되고, 최창익과 박창옥은 당직을 박탈당합니다.
그러나 김일성 그룹의 대응은 중국과 소련의 개입을 가져왔습니다. 중국 국방부장 팽덕회와 중국의 요청을 받은 소련 부수상 미코얀은 급히 북한으로 들어와 김일성 그룹의 결정을 번복하게 했던 거죠. 이러한 중국과 소련의 개입은 김일성 계열에게는 최대의 위기였습니다. 이제 김일성 그룹은 수세적 입장에 서게 된 것입니다.
반전 : 단일지도체제의 확립
그러나 1956년 10월 헝가리 사태가 발생하고, 1957년 중소분쟁이 표면화하기 시작하는 등 국제 정세가 급변함에 따라 김일성은 국면 전환의 기회를 맞게 되었습니다. 특히 중국은 폴란드, 헝가리 사건 과정에서 발생한 사회주의 진영 내의 불만을 활용하여 사회주의권에서의 발언권을 강화하고자 했죠. 이러한 이유로 중국의 마오쩌뚱은 8월 종파사건에 개입했던 일을 사과하고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추진하게 됩니다. 8월 종파사건 이후 최악의 정치개입으로 심각한 정치적 종속을 경험하였던 김일성 그룹은 이제 중국의 자주노선에 편승하여 외세에 대한 자주적 외교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김일성 그룹은 주체를 기반으로 한 단일지도체제 형성을 목표로 전 사회적 차원의 반종파 및 사상투쟁을 단행하였습니다. 이제 '8월 종파사건'은 더 이상 '8월 종파사건'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1957년 김일성 그룹은 이 사건을 '최창익 반당그룹사건'으로 명명하면서 사건의 범위와 대상을 전 국가 기관과 당 기관, 전사회적 차원으로 확대하게 됩니다. 이때 발생한 '제3당사건'도 이러한 움직임의 연장선상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1950년대 북한의 반종파투쟁의 종결점으로서 전 사회적 차원의 대대적 숙청작업을 마무리하고 단일지도체제의 확립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백준기, <정전후 1950년대 북한의 정치변동과 권력재편>, <<현대북한연구>> 2권 2호, 1999
백준기, <1950년대 북한의 권력갈등의 배경과 소련>, <<1950년대 남북한의 선택과 굴절>>,역사비평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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