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득중의 '이승만정부의 여순사건 왜곡과 국회논의의 한계'

저자는 대한민국정부와 기타 정치세력들이 여순사건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를 밝히고자 합니다. 또한 이러한 인식이 여순사건의 본질을 어떻게 왜곡하게 되었는가를 밝히는 것이 그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저자는 이런 방법을 통해 여순사건의 본질에 다가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는 여순사건이 분단정권 수립에 따른 통일정부 수립의 좌절과 해방후 일제 잔재가 청산되지 못한 사회구조 속에서 발생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순사건은 일차적으로 경찰에 대한 반감으로 지역 군부대에 의해서 촉발되었고, 식량문제 등 사회경제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민간의 지지를 받고 광범위한 사건으로 확대되었다는 겁니다. 자, 그럼 이승만정부의 무시무시한 음모를 하나씩 파해쳐보죠.

김구, 여순의 주모자?
이승만정부는 여순사건이 발생하자 김구세력이 이 사건의 주모자인 것처럼 선전합니다. 정부는 이때 혁명의용군사건을 조작 발표하고 극우인 김구세력과 좌익인 남로당세력이 연합하여 여순사건을 일으켰다고 주장합니다. 정부가 발표한 혁명의용군사건은 14연대 연대장 오동기와 최능진, 서세충, 김진섭 등이 관련된 것으로 발표되었는데, 주모자로 지목된 최능진과 오동기는 여순사건이 일어나기 전인 10월 1일에 이미 체포된 상태였습니다. 당연히 정부의 주장은 개연성이 없었기 때문에 일반 국민들을 납득시키는데는 실패했어요.

한편 김구측은 즉시 여순과 자신들의 관련성을 부인하였습니다. 하지만 남로당이 관련되어있다는 점에선 정부의 발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인식을 보여줍니다. 미국측은 최초의 언급에서 일부 경비대와 지역 좌익에 의한 반란으로 판단하였다가, 10월 24일 이후 남로당이 관련되었다고 발표합니다.

한편 이승만정부는 여순사건을 초기 진화하는데 실패합니다. 여순사건의 장기화는 곧 이승만정부의 체제 위기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게 되죠. 그러자 정부는 여순사건이 공산세력에 의해 일어난 것으로 주장합니다. 즉 반란의 주체는 14연대 장병이 아니라 민간좌익들이 계획적으로 일으킨 행위라는 거죠. 이것은 초기 반란의 주체가 실제로 국군이었다는 사실을 은폐하는 것입니다. 여순사건은 북한 공산주의자들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국제공산주의 운동이 개입한 결과라고 마구마구 확대 해석되어 버립니다. 이승만정부는 왜 이런 거짓말을 했을까요?

정부가 이러한 허위사실을 유포한 것은 신생정부의 근간인 군 내부에서 반란이 터졌다는 사실 자체가 정부 능력에 결정적인 흠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입니다. 동시에 여순사건에 많은 민간인이 가담한 사실 역시 이승만정부의 실정으로 읽힐 수 있는 대목입니다. 때문에 정부에게 여순사건의 주도자는 군인도 민간인들도 아닌 남한사회의 영원한 적인 공산주의자이어야만 했습니다. 11월 9일자 콜터와 무초의 전문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미국 역시 이러한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주한대사 무초는 ‘오늘날 가장 필요한 것은 냉정한 자신감과 정부 내외의 비공산주의자들에게 공산주의자들이야말로 진짜 적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시켜주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야말로 진짜 적?
정부의 이러한 인식은 여수·순천지역에서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계엄령 발포로 나타났습니다. 저자는 10월 22일 발표된 계엄령은 불법적인 것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사실 남한에는 당시 계엄령이라는 법률이 제정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국회도 아닌 국무회의에서 계엄령이 제정되었고 전남지역에 광범위하게 실시되었었죠. 모두 아시듯이 상식적으로 국무회의는 법률을 제정할 권리가 없습니다. 이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죠. 설사 그것이 법률에 의거한 계엄령이라 해도 즉시 국회의 사후동의를 얻어야 합니다. 그러나 정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만약 이때 실시된 계엄령이 계엄령이 아니라 헌법 57조의 긴급명령·긴급재정처분에 의한 긴급조치였다고 해도 정부는 국회의 사후동의를 얻어야 했습니다. 정부는 이것 역시 하지 않았죠. 두 가지 경우 모두 이를 어겼을 때에는 대통령과 국무위원 모두 탄핵의 대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저자는 계엄의 유효시기와 지역 범위, 효력에 대해서도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전남지역에서 실시된 계엄령은 합위지경도 넘어서는 강력한 계엄령이었습니다. 대개 계엄령은 군사와 관계된 행정. 사법 업무만을 처리하는 임전지경과 일반적인 행정 사법 업무를 모두 군에서 처리하는 합위지경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전남에서 실시된 계엄령은 법률에 의거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권한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없었죠. 이때 실시된 계엄령은 대체로 일제시기의 계엄령에 의거해 있었는데, 부역자색출과정에서 재판없이 즉결처분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일제시기의 계엄령 내용에도 없는, 합위지경의 내용도 한참을 넘어서는 울트라 계엄령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국회에서는 본 계엄령의 법리적 불법성을 제대로 추궁하지 못했고,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의 헌법위반 사실도 제대로 따지지 못했습니다. 합위지경을 넘어서는 계엄령 자체가 가진 탈법적인 통치행위 역시 제대로 문제제기 하지 못했습니다. 국회는 10월 30일 시국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정부가 금번 사건에 책임을 지고 거국 내각을 조직하여 민심을 안정시킬 것 주장하는 결의안을 채택합니다. 국회 소장파의원들은 언론탄압중지, 경찰독재반대, 민주주의적 정부 구성을 요구합니다. 한 신문은 여순사건 처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친일잔재청산(친일경찰문제)과 민심수습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부는 이러한 국회나 언론의 주장을 무시하고 정부 자신들의 책임을 완전히 부정합니다. 국회와 민간, 언론이 끊임없이 경찰에 대해 비판했지만 정부는 이 문제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승만은 여순 진압이후 국가보안법을 통과시키고, 학도호국단을 만들어 반공체제를 확립해 나갔습니다. 또한 김구 암살과 국회프락치 사건을 통해 자신의 오랜 정적을 말살하고, 진보적 세력을 숙청하여 체제를 안정시키고자 하였습니다. 저자에 의하면 여순사건은 결국 이승만정부에게 탈법적인 통치행위를 작동시킨 계기이자, 물리력으로 국민과 직접 대결하여 통치하는 경험을 가져다 준 사건이었습니다. 사실 이승만정부는 이 사건 이후 수시로 계엄령을 사용해 정권을 유지하게 되죠.

김득중, <이승만정부의 여순사건 왜곡과 국회논의의 한계>, <<역사연구>> 7호, 역사학연구소,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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