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아시겠지만 자유당은 1951년 12월에 창당한 제 1공화국 이승만 정권의 여당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자유당’이란 이름을 가진 정당은 두개였습니다. 하나는 현역 국회의원들이 만든 당이었고, 다른 하나는 국민회, 대한청년단, 대한노총 등 국회밖 사회단체들이 만든 당이었죠. 사람들은 이 두 당을 구분하기위해 각각을 원내자유당과 원외자유당이라 불렀습니다. (사진은 장면)후세 사람들은 흔히 이 두 당을 혼동해왔습니다. 혹은 원래 같은 지향을 가진 자들이 원내와 원외에서 각각 당을 만든 다음 뒤에 합당한 것이니 둘은 원래 같은 것이라고 동일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한 오류입니다. 두 자유당은 주도 세력만 달랐던 것이 아니라 정치적 지향점도 달랐거든요. 두 자유당은 서로 다른 정당이었습니다. 후세 사람들의 혼동은 자유당이란 동일한 이름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명확히 서로 다른 정당이 왜 같은 이름을 갖게 된 걸까요? 대체 자유당이 창당되던 그 시점에 무슨 일들이 있었던 걸까요?
신당창당운동
1950년 5.30선거로 구성된 제 2대 국회는 제헌국회와 달랐습니다. 특히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이 대거 국회에 진출을 했죠. 이들의 국회 진입은 남한 정치의 세력 판도를 넓히는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중도파 세력은 와해되어 버렸어요. 안타까운 일이죠. 제 2대 국회의 주도권은 다수의 무소속의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대다수 무소속의원들은 공화구락부(1)를 구성하고 정치적 노선을 함께 합니다. 이들은 이승만 정부의 실정을 비판하면서 대통령중심제의 무책임성에 회의를 느끼게 되죠. 결국 이들은 양당체제를 바탕으로 한 내각책임제를 지향하게 됩니다. 이를 위해 이들은 신당을 창당하고자 했구요. 하지만 신당을 필요로 했던 것은 이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승만도 자신의 정치세력을 대변할 신당을 필요로 했죠. 사회민주주의적 지향을 갖고 있던 조봉암도 신당을 준비하고 있었구요.
공화구락부는 신당 창당의 첫 번째 작업으로 국회내 제 1당을 추진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공화민정회입니다. 신정동지회와의 제휴를 한 것이죠. 신정동지회는 원래 대한청년단 세력을 중심으로 구성된 단체입니다. 이들은 원래 친 이승만 계열이었어요. 그러나 이들은 국민방위군사건으로 최대의 정치적 위기에 직면합니다. 신정동지회의 주요 인사들이 이 사건의 주요한 연루자였음이 드러났거든요. 신정동지회는 내분에 휩싸이고 결국 이러한 위기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성격이 전혀 다른 공화구락부와 제휴하게 되는 겁니다. 물론 이 외에도 다른 요인들도 작용했겠죠. 이들도 이승만 정권의 실정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고, 자신들에 대한 이승만 정권의 처우에도 불만이 많았다고 합니다. 여하튼 공화구락부는 신정동지회의 위기를 활용해 국회내 제 1당이 되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절반의 성공이었죠. 이질적인 두 단체의 이해관계에 입각한 이합집산. 이것은 도덕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이들에게 커다란 한계였습니다.
한편 이승만은 국회내 민국당을 제외한 모든 세력에게 신당 결성을 타진합니다. 일민주의를 정치이념으로 자신에게 충성하는 자를 중심으로 신당을 결성하겠다는 생각이었죠. 이승만은 공화민정회에도 이런 의도를 내비쳤지만 뜻대로 잘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원외 5개 단체 즉 국민회, 대한청년단, 대한노총, 대한부인회, 대한농총 등을 중심으로 신당 창당을 준비하게 됩니다. 물론 공화민정회의 신당 창당에는 엄청난 방해 공작이 가해지게 되구요.
이 과정에서 바로 두 개의 자유당이 탄생하게 됩니다. 신당을 자유당이라고 정한 것은 공화민정회가 먼저였습니다. 하지만 이승만의 원외 신당 결성 세력은 이미 자신의 정당을 통일노농당이라 정하고도 별다른 이유없이 자유당이라고 고치게 됩니다. 이들은 공화민정회 측이 국회사무처에 신당 신고하는 것을 방해하고 자신들의 신당을 자유당으로 등록하는 추태까지 보이죠.
여당 출현.부산정치파동.이승만의 재선
이승만은 대통령직선제로의 개헌을 추진합니다. 1952년 대통령선거에서 국회가 대통령을 선출하는 기존의 간선제를 따른다면 사실상 이승만의 재선은 불가능했던 거죠. 하지만 이승만은 국회 표결에서 엄청난 표차로 개헌을 저지당합니다. 국회에서 대통령의 뜻은 전혀 관철되지 않았습니다.
공화민정회는 내각책임제 개헌으로 이에 맞섰습니다. 하지만 이들도 이승만 세력의 반대로 그들의 뜻을 관철시키진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차선책으로 장면을 대통령으로 추대하여 권력을 장악하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은 꿈이 아니었습니다. 사실상 국회의 다수는 이승만의 재집권을 반대하고 있었고, 이러한 사실 때문에 이승만 측이 이들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던 겁니다.
이승만은 부산정치파동이라는 일종의 친위쿠데타로 장면을 지지하는 원내자유당을 폭력으로 와해시켰습니다. 이들 국회의원들은 졸지에 국제공산당의 일원이라고 선전되었어요. 그 다음은 다들 잘 아시듯 직선제 개헌안이 통과되고, 이승만이 재선에 성공하게 되는 거죠. 한편 장면을 지지했던 원내자유당 잔여세력은 이후 장면을 중심으로 한 민주당 신파가 됩니다.
주 1) 이들은 무소속구락부-공화구락부-공화민정회-원내자유당이라는 변화를 겪습니다.
[덧붙임] 이승만은 자신의 당을 원했다
이승만에 대한 오래된 오해가 하나 있죠. 이승만은 정당무용론을 주장했고, 1951년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당을 창당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승만은 한민당과 결별한 후부터 계속 자신을 지지하는 자신만의 정당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1948년 9월 창당한 대한국민당이 그 최초의 결과물이었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승만 자신이 만족할 수 없는 부실 덩어리였습니다. 이승만은 49년, 50년 계속해서 이렇게 자신만의 신당을 결성하려고 무진무진 애를 썼답니다.
연정은, 제 2대 국회내 공화구락부-원내자유당의 활동에 관한 연구, 성대석사논문,1997
서중석, 자유당의 창당과 정치이념, 한국사론 41.42합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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